Works

Archive of my life


이진형 <비원향>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0) 리뷰_월간미술 2020.5월호

untitled

냄새는 기억을 소환한다. 정체불명의 냄새가 코끝에 묻으면 무의식 저편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토막난 기억들이 떠오른다. 어릴 때 놀이터에서 만지던 흙, 더러워진 친구의 바지가 찢어지고 무릎이 깨져서 흘리는 눈물의 짠맛 같은 것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어떤 성분인지도 알 길 없는 냄새는 선잠을 자며 꾸는 꿈처럼 금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흩어진다.

올해 초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의 기금마련전이 시작되기 전 열흘 동안 전시장은 잠시 공실이 되었다.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과 작품이 들고났던 공간의 큐레이터들은 고요해진 열흘의 시간을 작가에게 내주었다. 작가는 작은 그림 몇 점을 챙겨서 전시장으로 내려가다가 문득 예전에는 몰랐던 향기를 맡았다. 알 수 없는 ‘지하(B1)’의 ‘향’이었다.  

사루비아의 가파른 계단부터 지하 1층의 공간을 가득 채운 향기를 붙잡으며 작가는 그림을 그렸다. 날씨와 공간의 상태에 따라 시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하는 향기를 어떻게 캔버스 위에 덧바르고 굳혔을까. 그 향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의 그림은 세상을 떠도는 온갖 이미지를 수집하는 명확한 행위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이미지를 작품의 ‘원본’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어느 정도 붓질을 시작하고 나면 더 이상 이미지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림을 완성할 때쯤 되면 이미지의 의도나 내용은 깨끗이 탈구되고 형태나 색감만이 흐릿하게 부유한다. 냄새처럼 떠돌던 물감은 캔버스의 표면에 기하학적인 형태로 굳어져 내려앉기도 하고 귀퉁이에만 살짝 색을 입힌 뒤 물감 자국을 흘린 채 흩어지기도 한다. 긴장감 있게 형태를 유지하는 사각형의 캔버스 틀은 다양한 표면의 질감, 물성, 색감들을 프레임 안에 가둔 채 이 공간을 의도치 않은 통일성으로 매듭짓는다. 덕분에 사루비아의 지하는 어느 것 하나 홀로 삐죽하게 솟아있지 않은 채 하나의 분위기와 색을 입고 서서히 침잠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개를 동시에 그려요. 색이 더 필요하다 싶으면 색을 더 쓰고, 어떤 그림의 색 하나를 따와서 다른 캔버스에 칠하기도 하고.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평면이 거의 동시에 생겨나면서 그 평면들 사이에도 군집이 생겨요. 그러다 보면 어떤 작품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조응이 생기는 것 같아요.”

작품의 의도나 작품들 사이의 관계 혹은 명확한 연결고리 같은 것들은 ‘무제’로 통일되어버린 캡션 리스트를 포함해 그 어떤 텍스트에서도 제시되지 않는다. 결국 정의할 수도 없고 되새기기도 어려운 향기처럼 작가의 작업에 고정된 의미를 부여하거나 세밀한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무엇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을 가득 채운 ‘자연스러움’은 빼곡한 설명문이나 거창한 의미 없이도 냄새처럼 시공간의 분위기를 장악하고 캔버스의 표면과 공간의 분위기만으로 모든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설명하고 드러내기보다 덜어낼 줄 아는 능숙함 때문에 전시 경험이 많은 작가처럼 보이지만, 이 전시는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 종종 나의 속도는 세상의 속도와 일치하지 않고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세상의 속도보다 조금 느리게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긴 작가는 지금도 층고가 낮은 성수동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의 다음 작품도 자연스러운 향기처럼 우리에게 스며들기를 바란다.

이진형 Lee Jin Hyung

1982년 출생했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첫 개인전 〈비원향〉(2020)을 열었다. 〈side-b〉 (가고시포갤러리, 2019), 〈지표면이 융기와 침강을 반복한다〉 (신한갤러리역삼, 2018) 등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중이다.

〈비원향〉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전시 전경(3.25~4.24)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