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s

Archive of my life


정유진 <해류병> (시청각랩 2021) 리뷰_월간미술 2021.3월호

재난의 비경(秘境)

세상에는 재현이라는 예술의 숙명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방관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만드는 예들이 있다. 리오타르에게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인 일이었고 9·11테러와 아프간전쟁 이후 미국의 문화예술계는 마치 예술이 윤리의 하위 개념에 귀속된 것처럼 표현의 자유를 불허했다. 윤리적 강박으로 예술의 존립 근거를 포기할수록 오히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무책임과 정치적 검열이 싹텄다.

예술에 있어서 재난의 재현에 관한 윤리성 비판은 인터넷 시대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우리를 둘러싼 검은 디스플레이의 숲에서는 몇 번의 손가락질 끝에 적나라한 재난의 이미지가 솟아나고, 우리는 그것을 무자비하게 확대재생산하는 익명의 데이터 뭉텅이들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제 재난은 미리보기, 섬네일, 허접쓰레기, 떠도는 이미지로서 무료 배포*된다.  

매체와 환경의 변화로 재난의 재현에 관한 새로운 논쟁이 요청되고 있는 셈인데, 그래서 바로 지금 예술은 재난을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정유진은 재난을 기록할 뿐 아니라 ‘재난이 되어버린 재현’, 즉 세계가 방관하거나 소비하고 있는 재난을 말한다. 〈해적판 미래〉(2019)는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와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방사능 누출 사고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작업이다. 작가는 방사능 피폭 위험 지역에 직접 발을 디디지만 타인의 고통에 감정적으로 동기화되는 대신 적절한 거리두기를 택한다. 체르노빌의 폐허를 테마파크처럼 소비하는 모습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현지에 방문해야 하고, 그곳이 아무리 조야한 관광지가 되더라도 비극의 편린은 남기 마련”이라고 언급한 아즈마 히로키의 일견 타당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미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방사능 오염 지역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이들의 인터뷰에서는 재난이 남긴 폐허가 언젠가 정상궤도로 복귀할 수 있으리라는 긍정도 함께 읽힌다. 철저한 현장고증만을 남기고 극적인 연출의 잔가지는 모두 쳐낸 다큐멘터리의 건조함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예술의 숙명을 성실하게 이행함으로써 잊혀가는 타인의 고통을 실체화한다.  

종말은 시각매체에서 가장 매혹적인 이미지 중 하나였고,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품은 미지의 폐허로서 우리를 압도해 왔다. 스펙터클한 종말을 마주할 때 가슴에서 요동치는 숭고미는 작가의 설치작업에서 해소된다. 작가가 보여주는 큰 스케일의 설치는 특정한 사건을 직접적으로 지시한다기보다는 묵시록적이고 제의적인 세계관으로 쌓아 올린 가상의 재난으로서, 파도나 폭발로 부서진 잔해처럼 쉽게 유추할 수 없는 소재와 색과 모양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의 재난은 생명력을 가진 미지의 유기체처럼 보인다. 고바야시 다이요와 함께 한 2인전 〈해류병〉(2021)에서 작가는 노트북에 두껍게 쌓인 더미 데이터의 장례식을 치렀다. 재난을 말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재난의 귀퉁이들은 조각작업 〈Funeral of Eugeene95’s Macbook Pro〉(2021)로 다시 응축된다. 작가의 재난은 마치 우리 삶의 크고 작은 사건들처럼 몸집을 불렸다가 작아지고, 사라졌다가 결합되기를 반복하며 방관자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새겨지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재난이 반성 없이 잊히고 피해자들의 삶이 삭제되는 것처럼 작업도 전시장에서의 역할이 다하면 제 한 몸 누일 곳이 없어진다. 다행히도, 폭발 후의 잔해를 연상시키는 조각 〈무자비둥〉과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종이벽돌로 만들어진 〈폭삭벽〉은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취미가의 〈숏서킷〉(2021)에서 해체되어 다시 공개되었다.  

인터넷이 빈곤한 이미지의 홍수를 만들었듯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인류에게 재난은 내밀한 공통분모가 되었다. 타지와 타인의 재난을 서술해 온 작가는 이제 모두에게 개인적인 경험이 된 이 새로운 재난의 비경(秘境)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워크룸 2016 p.41

**아즈마 히로키 <약한 연결> 북노마드 2016 p.68

정유진(Jung Eugene)

1995년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와 전문사를 졸업했고 도쿄예술대 대학원 조각가 교환프로그램을 수료했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정보 이미지, 만화의 세계관으로 지금 시대의 재난을 바라보는 시선을 드러낸다. 개인전 〈적어도, 현실답게〉(화랑자리, 일본, 2019), 단체전 〈한국에서의 8명〉(파프룸갤러리, 일본, 2019), 〈유어서치, 내 손 안의 리서치 서비스〉(두산갤러리, 한국, 2019), 〈3×3 애프터10.12〉(시청각, 2019), 고바야시 다이요와의 2인전 〈해류병〉(시청각랩, 2021), 단체전 〈숏서킷〉(취미가, 2021) 등 다수의 전시를 열었다.



댓글 남기기